안과 겉 - 알베르 카뮈
이 극단한 의식의 극한점에서 모든 것이 하나로 융합되면서 나의 생은 송두리째 버리든가 받아들이든가 해야 할 하나의 덩어리처럼 생각되는 것이었다.
다시 읽은 카뮈
2년 전에 읽은 ‘페스트’가 내가 마지막으로 읽은 카뮈의 책이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를 꼽으라면 항상 카뮈를 후보에 올리면서도 정작 그의 글을 읽은 지는 너무 오래되었다. 마침 밀란 쿤데라의 유작인 『무의미의 축제』를 읽고 이어서 읽을 책을 찾던 중에 오랜만에 카뮈의 글을 읽어보기로 했다.
『안과 겉』은 카뮈의 처녀작으로, 그의 가장 젊은 시절, 아직 다듬어지기 전의 날것 그대로의 카뮈를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 『페스트』까지 모두 읽고 나서 『안과 겉』을 읽었기 때문에 메시지가 상당히 겹치고 구조적으로도 유사하다고 느낀 부분이 많았다. 완성도로 따진다면 역시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를 더 높이 평가하겠지만, 그의 생각과 반항이 태동하던 시기의 문장을 읽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일이다.
책에 대해 자세히 말하기 전에 감상을 조금 더 늘어놓자면, 카뮈의 문장이 참 마음에 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카뮈의 글을 좋아했던 이유는 필력보다는 그 당돌한 주장, 즉 인간이 애써 외면하려는 삶의 고독과 허무함을 적나라하게 짚어내는 예리함에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의 글을 곱씹어 보니 문장 자체로도 읽는 맛이 좋은, 훌륭한 문장들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의 문장도 사랑했던 게 아닐까. 그의 처녀작에서 문장의 아름다움을 느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아이러니다.
내가 읽은 책은 『안과 겉』의 본문과, 나중에 카뮈가 되돌아보며 쓴 자기고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들의 뿌리가 『안과 겉』에 있으며, 그것이 자신을 작가로서 마르지 않게 하는 샘물과 같다고 말한다.
예술가는 그처럼 저마다 일생을 두고 그의 됨됨이와 그가 말하는 것에 자양을 공급해 주는 단 하나뿐인 샘을 내면 깊은 곳에 지니고 있다. 그 샘이 고갈되면 작품은 말라비틀어지고 쪼개져 버리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중략> 나의 경우, 나의 샘은 『안과 겉』 속에, 내가 오랫동안 몸담아 살아온 그 가난과 빛의 세계 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세계의 추억이 지금도, 모든 예술가들을 위협하는 두 가지 상반되는 위험, 즉 원한과 자기만족으로부터 나를 지켜 주고 있는 것이다.
또 그는 자신의 어릴 적 가난이 자기 정신을 풍족하게 했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사랑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즉 예술가에게 부와 풍족함은 곧 정신의 빈곤과 같다. 어쩌면 예술은 결핍을 전제할 때 비로소 태동하는 것이다. 결핍은 사람으로 하여금 말하고 싶게, 때론 외치고 싶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겪었던 빈곤은 나에게 원한을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어떤 변함없는 충직함, 그리고 말없는 끈기를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그의 만성적인 무기력함과 허무함을, 가난이라는 것이 한 번씩 깨워온 것은 아닐까.
할머니와 어머니
『안과 겉』 본문은 죽음을 앞둔 노파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녀는 이미 늙을 대로 늙었다. 주름지고 둔해져버린 그녀의 이야기는 젊은이의 흥미를 끌지 못했고, 그 앞에 드리운 불안과 두려움은 그녀로 하여금 더 격렬하게, 끊임없이 말을 쏟아내도록 만들었다. 그녀는 단순히 젊은이들의 무관심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멸로부터, 진짜 죽음으로부터 공포를 느낀 것이다. 사실 이미 그때부터 노파는 죽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노파가 이제 모든 것에서 다 해방되었으나 신만은 예외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정숙한 여자가 되어, 그 마지막 남은 고통에 온통 몰두해 있는 노파는 자기에게 남은 것이야말로 사랑을 바칠 만한 유일한 대상이라고 너무 손쉽게 믿은 나머지, 마침내 신을 믿는 인간의 비참 속으로 돌이킬 수 없이 빠져든 것이다. 그러나 삶의 희망이 되살아나면 신은 인간의 관심사에 대적할 만한 힘이 부족하다.
그 노파는 사실 화자의 할머니였다. (그리고 카뮈의 진짜 할머니이기도 하다. 이 책은 카뮈의 가장 자전적인 소설이기도 하다.) 그녀는 가정을 진두지휘하는 사령관 같은 사람이었다. 마치 집안의 모든 일을 자신이 짊어지고 있다는 듯 스스로 책임을 자처하는 사람이었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불행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으며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존경과 사랑을 요구하는 눈치를 보인다.
주인공의 어머니는 장애가 있어 정신이 또렷하지 않은 인물로 그려진다 (실제로 카뮈의 어머니는 청각장애를 앓았다고 전해진다). 그런 어머니에게도 할머니는 강압적으로 대하곤 했다. 할머니 탓인지 어머니는 무기력하다. 그녀는 항상 지친 몸을 이끌고 살아간다. 할머니가 손주들에게 매를 들며 혼낼 때에도 작은 목소리로 ‘머리는 때리지 마세요’라고 속삭일 뿐이다.
어머니는 자식들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것을 드러내지는 못한다. 드러내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화자는 말하지 않아도 어머니의 사랑을 알고 또 느끼지만, 때로 그녀의 무심함이 어딘가 모르게 화자의 가슴을 미어지게 만들기도 하는 듯하다.
이 책은 죽음 앞에 선 세 가지 운명에 대한 이야기이다. 모든 사람은 죽음 앞에 선 운명이기에, 이것은 세 가지 부류의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즉 화자의 할머니와 어머니는 각각 그중 두 부류의 인간에 대한 상징이자 고백이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정반대의 인물이다. 이 둘의 대조는 죽음과 삶의 허무라는 심연 앞에 선 사람의 갈림길을 보여준다. 할머니는 허무에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부정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사회(가정)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통해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생산하고자 한다. 가정을 진두지휘하듯 자기 인생과 나아가 세상까지도 통제하기를 바라며, 스스로를 강하게 단련하는 것이야말로 무기력함에 맞서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때로 용맹하고 지혜로워 보이지만, 실상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과 책임을 스스로에게 강제함으로써 얻는 도취된 위안으로 삶의 허무함을 잊으려는 것에 가깝다. 허무함을 마주하고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는 삶인 셈이다. *‘자신이 자유롭다고 오해하는 사람보다 더 절망적인 노예 상태에 있는 사람은 없다’*던 괴테의 말이 떠오르는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할머니의 말로는 더이상 외면하지 못하는 삶의 고독 앞에서 무너지는 것이다.
반대로 어머니는 삶의 무게 앞에서 무기력한 사람이다. 그녀는 할머니처럼 무언가에 저항하거나 맞서 싸우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싸움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녀에게는 낯선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세상은 언제나 온전히 붙잡히지 않는 무엇이었고, 그 흐릿함 속에서 그녀는 언어 대신 침묵으로, 말 대신 몸짓과 눈빛으로 살아가는 법을 익혔다. 그녀에게 삶이란 정복하거나 극복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그저 견디고 받아들여야 할 무엇이었다.
할머니가 허무 앞에서 스스로를 무장시킨다면, 어머니는 그 앞에서 무장해제된 채로 서 있다. 저항하지 않기에 오히려 허무에 잠식된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그 무저항 속에는 어떤 순연한 것이 깃들어 있다. 그녀는 삶을 해석하거나 판단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그것을 살아낼 뿐이다. 화자가 어머니에게서 느끼는 애틋함과 안타까움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된다 — 그녀의 사랑은 존재하지만 발화되지 못하고, 그녀의 슬픔은 있지만 표현되지 못한다. 사랑한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행위도 그녀에게는 낯선 언어와 같다. 그녀는 다만 존재함으로써 사랑을 증명할 뿐이다.
이 무기력은 그러나 단순한 나약함으로 치부될 수 없다. 오히려 세계와의 어떤 원초적이고 매개되지 않은 관계를 암시한다. 할머니가 언어와 역할과 신념으로 세계를 정돈하려 했다면, 어머니는 그 어떤 프레임도 갖지 못한 채 세계를 날것 그대로 받아들인다. 사유하지 않기에 절망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곧 구원이나 성취일 수는 없다. 그녀는 반항에 이른 것이 아니라, 반항이 자라날 수 있는 토양 그 자체에 가깝다. 카뮈는 어쩌면 이 침묵의 세계에서, 훗날 자신이 의식적으로 쟁취해야 할 반항의 재료 — 언어 이전의, 해석 이전의 감각과 인내 — 를 미리 물려받은 것 같다.
화자의 반항
화자, 즉 어린 카뮈는 이 두 여인 사이에서 성장하며 자신만의 세 번째 길을 발견한다. 그는 할머니의 방식, 즉 역할과 책임과 신념으로 허무를 덮어버리는 의식적 회피를 택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어머니의 방식 그대로, 즉 의식조차 갖지 못한 채 침묵 속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대신 그는 어머니가 물려준 것 — 언어 이전의 감각, 가난과 빛에 대한 몸의 기억 — 을 고스란히 지닌 채, 거기에 할머니에게도 어머니에게도 없었던 단 한 가지, 즉 의식을 더한다. 그것이 그가 택하는 제3의 태도, 눈을 뜬 채로 심연을 응시하는 일이다.
이 응시는 훗날 그의 철학 전체를 관통하는 태도, 곧 명철함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죽음과 소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되, 그 받아들임이 체념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붙든다. 할머니의 신앙도, 어머니의 침묵도 그에게는 위안이 될 수 없었다. 위안 없이 살아가는 법 — 그것이 그가 찾아낸 자신만의 생존법이었다.
나에게는 어떤 위대함이 필요했다. 나는 나의 깊은 절망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들 중 하나가 지닌 저 은밀한 무관심의 대조 속에서 그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거기에서 나는 용감해질 수 있는 동시에 의식적일 수 있는 힘을 길어 냈다. 그렇게도 어렵고 그렇게도 역설적인 일만으로도 나로서는 충분했다. 그러나 아마도 나는, 그때 그렇게도 올바르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의 그 무엇인가를 이미 왜곡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중략> 두 도시가 다 내게는 귀중하며, 나는 빛과 삶에 대한 나의 사랑을, 내가 묘사하려 했던 그 절망적인 경험에 대한 나의 숨은 애착과 따로 떼어서 생각하기가 어렵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안과 겉』이라는 제목이 갖는 의미가 온전히 드러난다. 그는 삶의 안쪽 — 가난과 병약함과 죽음이 도사린 어두운 이면 — 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삶의 겉 — 알제의 태양과 바다, 빛과 육체의 관능 — 을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 두 세계 중 어느 하나를 택해 다른 하나를 지우는 대신, 둘을 동시에 끌어안는 길을 택한다. 훗날 그가 『시지프 신화』에서 부조리를, 『반항하는 인간』에서 반항을 이야기할 때, 그 사유의 원형은 이미 여기, 할머니와 어머니라는 두 죽음의 얼굴 사이에서 그가 발견한 세 번째 자리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은 없다.
그러므로 이 책의 진짜 주제는 단순한 유년의 회고가 아니라, 하나의 윤리적 선택이다. 위안을 구하지 않되 절망에 투항하지도 않으며, 다만 두 눈을 뜬 채로 삶의 빛과 어둠을 동시에 응시하는 것. 그것이 카뮈가 이 처녀작에서부터 이미 예비하고 있었던 그의 반항과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