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YS1025
Book Review
Essay
Philosophy

피로사회 - 한병철

2026-04-04

이번 달 들어 릴스와 숏츠 같은 숏폼 콘텐츠를 줄이기로 했다.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앱을 지운 것이다. 끊임없이 내려가는 스크롤에 정신이 조금씩 마모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앱을 지우고 나니 걷거나 밥을 먹는 시간 사이사이에 공백이 생겼다. 별다른 의미도, 자극도 없는 심심한 시간. 그 짙은 무료함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그 빈자리를 팟캐스트로 채우기 시작했다. 오래전에 좋아요만 눌러두고 꺼내보지 않았던 이동진의 빨간책방을 1화부터 연달아 듣는 중이다. 이동진과 김중혁 작가의 박식하고 유쾌한 케미가 마음 한켠을 따뜻하게 데웠다. 같은 자리에 모여 지적인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랄까. 그래서인지 더 재미있게 들렸다.

2화의 제목은 '낙관에 대한 비관'. 긍정주의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에피소드로, 한병철의 피로사회와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긍정의 배신이 그 주인공이었다. 이제 다 저물어가는 겨울의 문턱에서, 봄을 맞이하는 기분으로 100페이지 남짓한 얇은 철학서를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규율사회, 면역학적 부정성

근대 이전 사회를 관통하던 논리는 면역학적인 것이었다. 외부의 타자는 곧 부정성의 상징이었고, 사회와 이념은 그 타자에 맞서는 방식으로 조직되었다.

타자의 부정성이란 이질감, 혐오, 이방인에 대한 관념이다. 외부와 내부를 가르는 힘. 근대 이전 사회에 깊이 새겨져 있던 폭력의 형태였다. 그런데 저자는 역설적으로, 이 부정성이야말로 사회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로 했던 것이라 주장한다. '자아'라는 개념은 반드시 '타자'를 요청한다. 밝음이 어둠을 요구하듯, 선이 악을 전제하듯, 어떤 개념이 성립하려면 그 반대편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외부와 내부를 명확히 구분하고, 공동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한 절대적이고 강력한 규율이 세워졌다. 이것이 곧 규율사회다. 칸트의 초자아와 이성의 도덕적 요청조차도, 어떤 의미에서는 여전히 규율의 형식을 띠고 있다.

성과사회, 과잉긍정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지나 냉전이 끝날 때까지, 우리 사회는 줄곧 규율사회였다. 그러나 피로사회는 중·근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사회의 병리학적 패러다임이 전복되었다고 주장한다. 근현대 사회는 피로사회, 곧 성과사회로 이행했다. 더 이상 부정성이 사회의 동력을 지배하지 않는다. 타자와 자아의 경계가 흐려지고 거대한 긍정성만이 남으면서, 사회는 긍정주의의 시대로 넘어간다.

세계화의 흐름 역시 이런 이데올로기적 변화의 반영이며, 혐오와 배척은 어느새 '나쁜 가치'의 자리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폭력이 부정성에만 깃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긍정성의 과잉 상태에도 폭력은 존재한다. 오히려 그것이 더 위험한 이유는, 누구에게도 인식되지 않은 채 시스템 안으로 조용히 스며들어 내부에서부터 균열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를 신경증적인 증세로 진단하며, 우울증과 소진증 같은 현대의 특징적인 질환들이 바로 이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긍정주의가 지배하게 된 것은 시민이 혐오와 배척의 폭력성에 저항한 결과가 아니다. 현재의 이데올로기가 '성과사회'이기 때문이며, 이질성을 걸러내는 규율의 프레임보다 유연하게 수용하고 적응하는 긍정의 형태가 더 많은 성과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결국 시대를 관통하는 진짜 동력은 자본주의이며, 근현대 사회는 그것을 기반으로 촘촘하게 조직되어 있다.

성과사회의 폭력은 자기 착취의 형태를 띤다. 이전 세대의 폭력이 타자에 의해 착취당하는 방식이었다면, 현대의 폭력은 그 경계가 사라지면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동일인이 되는 구조다. 개인은 스스로 자율적이라 믿기 때문에 이를 자각하기 어렵고, 그래서 이 착취는 더 효율적으로 작동하며 사회는 더 많은 성과를 뽑아낼 수 있다.

줄어든 자아의 늘어남

저자는 한트케의 '줄어든 자아의 늘어남' 개념을 차용해 피로를 둘로 나눈다. 분열적 피로와 근본적 피로. 앞서 설명했듯 과잉긍정과 자아는 서로 배타적이다. 자아는 외부와의 구분을 필연적으로 요청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띠리사 부정성을 상실한 자아는 혼란해져 외부 세계를 배척하게 된다. 이질성을 감당할 수 없기에 외부의 개념 자체를 포기해버리는 것이다. 결국 자아는 더 무거워지고, 개인은 역설적으로 고립되어 각자의 피로를 홀로 감당하게 된다. 우리의 피로는 없어지고 나의 피로와 너의 피로만 남는다.

지친 오디세우스는 나우시카의 사랑을 얻었다. 피로는 젊음을 가져다준다. 그렇게 젊었던 적은 없었다고 할 만큼. 모든 것은 피로가 가져온 평온 속에서 경이롭게 된다.

근본적 피로는 그 반대로 작용한다. 자아와 부정성의 상실 사이에서 자아를 내려놓고 그 무게를 덜어내는 방식이다. 자아는 줄어들고 그 공백에 세상이 늘어난다. 이런 자아의 축소는 오히려 자아를 개방하여 세계가 그 안으로 새어 들어오게 만든다. 세계와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이원성이 복구되고, 분열적 피로에 의해 고갈된 자아가 회복된다. 균일화된 단일성이 아니라, 공존 가능한 이질성을 통해 분열을 극복하는 것이다.

최근 일부 임상연구에서는 DMN과 sgPFC의 과잉연결이 우울성 반추를 유발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과도하게 확대된 자아의 관념이 우울증과 소진증으로 이어진다는 주장이 기전적으로도 일리 있다는 말이다. LSD 계열 약물이 DMN 활동을 억제한다는 사실, 그리고 한때 예술가들 사이에서 그것이 유행했던 현상도 어느 정도 같은 맥락을 공유한다고 생각한다.


피로사회가 전면에 내세우는 테제는 매력적이고 독창적이다. 문장에 힘이 있고, 주장이 뚜렷하며, 설득력도 갖추고 있다. 푸코가 말했듯 시대의 담론은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는 법이다. 피로사회의 메시지는 우리가 무의식중에 가려두고 살았던 이 시대의 담론을 정확히 찌르는 것 같아, 허를 찌르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다만 주장에 대한 확신이 너무 강하고 명료한 탓에, 근거가 종종 생략되거나 단언에 가까운 인상을 받기도 했다. 100페이지라는 짧은 분량 안에서 동일한 메시지가 여러 번 반복되다 보니, 몇 문장으로 요약되는 핵심 주장 이외에 심오한 무언가가 더 있는가? 하는 의문이 살짝 남기도 한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은 분명했지만, 그 울림이 깊은 곳까지 퍼져나가지는 못했다는 느낌. 그럼에도 새로운 해석의 틀을 건네준다는 점에서, 철학서의 본분을 다한 책임에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