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의 가난
나도 좋은 글을 쓸 때가 있었다. 요즘 쓰는 문장들은 그렇게 세련되지 않지만, 예전에 쓴 글 중에는 지금 봐도 마음이 흔들리는 문장들이 있다. 그 사실이 조금 부끄러워서 펜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칙칙한 색의 코트를 꺼내 입고 길을 나섰다.
옷에 맞춰 딱딱한 구두를 신었다. 걷기엔 운동화가 편했겠지만, 오늘은 그런 날이 아니었다. 문을 나서니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다. 계절의 냄새는 다 지워지고 추위만 남은 겨울이었다. 방금 떠올린 옛 문장도 아마 이 정도 추위와 함께였을 것이다.
또각. 또각. 역시 칙칙함에 걸맞는 구두 소리다. 복장에는 분명 힘이 있다. 보이는 모양새는 그 꼴이 잘 어우러지는 곳으로 주인을 데려다 놓기 마련이다. 한참 생각을 지우고 걷다 보니 담배를 피우러 나온 철물점 주인 말고는 아무도 없는 한적한 길가를 따라가고 있었다.
철물점 주인의 담배가 타들어가는 게 보였다. 내쉴 때는 연기가 자욱했고, 들이쉴 때는 끝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익숙한 냄새였다. 어느 정도는 한국의 냄새였고, 어느 정도는 아버지의 냄새였다. 오늘은 유독 이 냄새가 밉지 않았다.
가난에 대해 생각했다. 담배가 타는 걸 보다가 든 생각이었다. 내가 보기에 가난은 두 종류다. 속세의 가난과 정신의 가난. 같은 단어를 쓰지만 둘은 다른 개념이다.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속세의 가난은 어지러움이다. 우리는 불쾌한 일들이 일상을 흔드는 것, 도태되고 소외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반면 예술가가 두려워하는 것은 어지러움이 없는 상태다. 속세의 가난이 사라지면 정신의 가난이 온다. 불쾌함과 단절되고 정념이 정리되면 마음은 평온해진다. 그러나 그 평온함 속에서는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창작은 필연적으로 어지러운 관념과 인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결국 예술가가 두려워하는 정신의 가난은, 속세의 가난의 부재에 기인한 가난이다.
좋은 글을 쓰던 시절을 돌아보면 내 삶은 가난했다. 의지는 자주 거절당했고, 불가피한 억압에 맞춰 살아야만 했다. 풀어내지 못한 것들이 속에서 얽히다가 결국 글로 나왔다. 지금은 그런 얽힘이 없다. 어지러움이 없다. 모든 것이 적당히 채워진 지금, 글을 쓸 만한 정념도 함께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