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세주의
사람이 한 곳에 오래 멈춰 있으면, 어떤 형태로든 염세가 그 속으로 스며들기 마련이다.
일종의 허무함. 무력함은 심연이 되어,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마저 심연으로 만든다.
무한히 반복되는 굴레 속에서, 그것은 하나의 증명이 된다.
굳어버린 증명은 속으로 곪을 뿐 아니라, 맞닿는 세상의 가능성들마저 시들게 한다.
한 편의 소망. 기도와 염원의 빛깔은 이미 종말의 신탁 앞에 놓여 있다.
결국 이것은 페스트처럼, 인류 전반에 번지는 전염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서 무의미를 좇는 부조리를 본 것이 아니다.
거기엔 죽어버린 꿈이 있었다. 한 시절의 열광과 빛나던 순간들.
그리고 이미 예견되었던 운명, 그 결정체를 하나의 심상으로 마주한 것이다.
그러니 염세주의는 사람에게서 옮지 않는다.
그 허망함은 사람에게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본질로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격동의 시기를 벗어난 이성은, 다만 그 부조리를 흡수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