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YS1025
Essay

중용에 관하여

2024-08-05

중용에 관하여

중학교 도덕 시간에 배운 개념 중 유일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중용'이었다. 인간은 왜 살아가는가에 대한 답으로 '행복'을 제시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법은 단순하면서도 명확했다. 이 개념을 배우기 전에도, 배운 후에도 내 인생의 방향성은 줄곧 중용이었다.

그러나 중용의 삶을 살다 보니 설명이 부족한 지점들이 있었다. 우선 행복과 쾌락을 동일시해야 하는지 명확해야 했다. 우리는 식사, 수면, 성관계에서 쾌락을 얻는다. 현대에는 마약으로 쾌락을 취하기도 하고, 미래에는 뇌에 전극 몇 개만 꽂아도 쾌락을 생산해낼 수 있을 것이다. 물질로 쾌락을 정량적으로 생산 가능한 현 시점에서 이 문제는 더욱 선명해졌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답에서 행복과 쾌락은 같은 개념이 아니었다. 나는 행복을 '쾌락의 미분계수'라고 생각했다. 간단히 생각해보자. 평생 월 소득이 1000만 원이던 사람은 다음 달에 1000만 원이 들어와도 감흥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월 소득이 200만 원인 사람에게 다음 달부터 1000만 원씩 주겠다고 하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일 수도 있다.

월 소득 1000만 원인 사람이 애초부터 월 200만 원인 사람보다 행복했을까? 그렇지 않다. 낮은 사람은 높은 사람을 보며 자신이 저 위치로 간다면 쾌락의 변화율이 커질 것을 알기에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고, 높은 사람은 반대로 행복하다고 느낀다. 이는 실제의 왜곡이다.

이런 상대적 비교는 현대에 이르러 의미가 퇴색했다. 더 이상 높고 낮음에 행복이 결정되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개개인에게 쾌락을 얻을 방법은 무수히 많아졌고 그 양에도 제한이 없다. 평생 유튜브만 볼 수도 있고, 평생 약물만 주입할 수도 있다. 미래에는 전극만 꽂아놓고 평생을 쾌락만 느끼며 살아갈 수도 있다.

과연 이런 삶이 행복한 삶일까? 결코 그렇다 할 수는 없다. 만약 맞다면 사람들은 지금 당장 뛰어나가 마약을 하거나 술만 진탕 마셔야 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내리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의외의 지점에서 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참 '인간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무엇이고 인간은 무엇인지, 꽤 복잡하고 어려운 질문이었다.

인간의 고유한 특성은 결국 함수로 기술된다. 주어진 자극과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쾌락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하고 얻었을 때는 어떻게 되는지. 그 모든 과정이 인간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쾌락이 무한하게 주어진 상황에서 인간성은 소멸되고 우리는 단순한 회로와 다를 바가 없어진다. 예를 들어 다이아몬드를 찾는 기계를 만들었다고 해보자. 이 기계는 지구를 돌면서 곳곳의 다이아몬드를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온 세상이 다이아몬드로 이루어진 행성에서 이 기계는 신호 발생 장치와 다를 바가 없다. 인간도 그렇다. 쾌락이 무한한 시점에서 복잡성을 잃어버리고 기계화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행복'을 본질적으로 잃는 결과를 낳는다.